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멘호테프 3세 (문단 편집) === 39년 간의 재위 === 아멘호테프 3세는 [[투트모세 4세]]와 무템위야 왕비가 기원전 1401년 경에 낳은 아들이었다. 이후 투트모세 4세가 왕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뜨자 대략 6세 정도의 매우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았으며, 성년이 되기 전까지는 섭정들이 대신 이집트를 맡아 통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재위 2년 되는 해에 티예를 왕비로 맞아들였고, 재위 11년 되는 해에 티예 왕비의 고향 자카루에 인공 호수를 만들라고 한 기록이 남아있다. 재위 10년에 100마리가 넘는 사자들을 단신으로 상대해 죽였다는 설화가 기록에 남아 전해져 내려오지만, 상식적으로 인간이 사자 100마리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아마도 과장되거나 미화를 위한 기록이라고 여겨진다. 다만 이를 통해 아멘호테프 3세 개인의 무력이 상당히 뛰어난 편이었다는 것까지는 어림짐작 할 수 있다. 아멘호테프 3세는 뛰어난 무예가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그의 재위기 동안 파라오는 쿠시 지방으로 한 번 밖에 원정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도 새로운 영토를 점령하거나 적국에 맞서 강역을 넓히려 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것. 재위 5주년에 그는 [[누비아]]의 쿠시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친림했고, 결과적으로 반란을 손쉽게 제압했다. 이후 아스완과 누비아 인근에 석비를 세워 그 공적을 기렸는데 이 석비는 아직도 남아있다. 파라오는 즉위 내내 정복 활동이나 무력 시위에는 큰 관심이 없어 거대한 궁전 축조나 축제 개최같은 내정에 신경을 많이 쏟았다. [[룩소르|테베]] 인근의 말카타 지방에 '페르-하이', 즉 '찬양의 궁전'을 지었는데, 이는 당시 이집트 역사상 가장 거대한 궁전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주로 진흙 벽돌들을 쌓아 축조했고 약 18년 동안 지어졌을 정도로 공사 규모가 거대했다. 재위 29년에 궁전이 마침내 완공되자 파라오는 바로 이 궁전으로 입주해 죽을 때까지 그 곳에서 살았다. 그는 재위 30주년, 34주년, 37주년 되는 해에 이 궁전에서 '세드 축제'를 집전했다. 세드 축제는 [[이집트 고왕국]] 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올 정도로 유서가 깊은 축제로, 주로 파라오의 공덕을 찬미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축제는 한 번 열릴 때마다 대략 2달 정도 지속되었는데 아멘호테프 3세는 이 축제를 위해 말카타 궁전에 [[아문]] 신에게 바치는 홀을 짓거나 대신전을 신축하여 봉헌하는 등 많은 건축물들을 지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아멘호테프 3세가 상하 이집트를 아우르는 대왕으로서 다시 한번 대관식을 치르는 행사였다. 많은 인파들이 이 행사를 보기 위해 모여들었고, 세드 축제는 이집트 최대의 관심거리였다. 그의 재위 도중 이집트의 외교 관계에 대한 상세 내용들은 대부분 아마르나[* 아멘호테프 3세의 후계자 [[아케나텐]]이 지은 이집트의 새로운 수도. 아케나텐이 야심차게 추진한 신수도 프로젝트였으나 아케나텐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버려졌다.] 지방에서 발굴한 '아마르나 문서'를 통해 알아낸 것이다. 아마르나 문서란 파라오가 [[아시리아]], [[미탄니]], [[바빌론]] 등을 포함한 중동 각국의 군주들과 교류했던 서신 내용을 담은 토판으로, 아멘호테프 3세 재위 30주년 되는 해부터 파라오 아케나텐 말년에 이르기까지의 세월에 걸친 이집트의 외교 문서이다. 주요 내용은 서로 금이나 보물 따위를 보내고 받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물건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는 것 따위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나마 눈여겨 볼만한 내용들 중에는 바빌론의 왕이 파라오에게 그의 딸을 바빌론으로 보내 왕비로 맞게 해달라고 한 요청을 매몰차게 거절한 것 등이 있다. 굳이 파라오가 바빌론의 부탁을 잘라 거절한 이유는 혹시 바빌론이 왕비의 혈통을 핑계로 아멘호테프 3세 사후 이집트 왕위를 주장할까봐 우려했기 때문. 아멘호테프 3세의 장남은 투트모세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오랫동안 왕세자로 있었다. 그러나 투트모세 왕세자가 아버지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차남인 아멘호테프가 왕세자직을 물려받았고, 이가 바로 훗날 아멘호테프 4세, 즉 [[아케나텐]][* [[아텐]] 신앙을 도입하면서 이름을 개명했다.]이 된다. 아케나텐은 아버지와 함께 일정 기간 동안 섭정을 맡으며 사실상의 공동통치를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멘호테프 3세의 말년에 파라오가 날이 갈수록 관절염과 [[비만]] 증세가 심해졌고, 이에 따라 건강이 심각히 악화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멘호테프 3세의 노년을 묘사한 티예 왕비 무덤의 벽화에 아멘호테프 3세는 약하고 왜소해진 모습으로 등장하며, 그의 미라를 학자들이 분석해본 결과 심한 [[충치]]에도 시달리고 있어 매우 고통이 심했을 것이다. 결국 아멘호테프 3세는 시름시름거리다 얼마 가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그의 뒤를 이어 후계자 [[아케나텐]]이 즉위하며 이집트 사회에 대격변을 일으킨다. 아멘호테프 3세는 [[왕가의 계곡]]에 안장되었다.[* 그의 무덤 WV22는 왕가의 계곡 서쪽 부근에서 가장 거대한 무덤에 속했다. 그러나 그의 무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도굴당했고, 파라오 스멘데스 시기에 다시 미라를 수선하고 부장품들을 정리해 다른 곳에 재매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